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이야기 (일기와 칼럼 사이)

어떻게 살 것인가,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

반응형

유시민 작가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래도 이미 읽었던 책이니 몇 글자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책을 읽었다. 그래서 사실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읽는 순간에 내용에 공감이 가지만 어떤 정치색이나 성향이 조금은 묻어나는 것 같아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제목을 잘뽑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이름의 책이 없었던 것인지 유시민 작가가 워낙 지명도가 있어서 이 책만 알려진 것인지는 모른다. 제목이 정말 좋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는 제목이다. 나도 아마 그래서 이 책을 읽었으리라.

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주변에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등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맞는 말같기도 틀린 말 같은 순간도 있고, 모르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삶에 정답이 있을까.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는 각자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본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며, 또 본인의 책임이다. 즉, 정답은 없다. 그들이 제시해주는 삶은 정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우리의 생을 마감할 때쯤, 스스로만이 알 수 있다. 다른 누구도 내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그들이 아무리 높은 점수를 줘도 스스로에게는 형편없는 삶일 수 있고, 남들이 욕하는 삶을 살았지만 본인에겐 만족스러운 삶일 수 있다. 결국 인생에 대한 모든 문제는 각 개인에게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개인의 삶을 알아서 살아가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그렇지만 잘알다시피, 우리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선택과 행동이 당신에게 영향을 주고,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너와 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모두가 모를 수 밖에 없다.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른다. 부모님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른다. 목사님도 모르고 스님도 모른다. 판/검사도 모르고, 대통령도 모른다. 하지만 고민해야할 문제다. 고민하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진다. 디테일까지 잡아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각 개인이 3가지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3가지를 갖추고, 그 안에서 각자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서로 옳고 그름을 주장하지 않으면 세상은 조금 더 다양하고 또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3가지는 '능력', '공감', '적당함'이다. 

우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이라는 단어가 다소 어감이 강하기 때문에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각자 개인이 사회에서 1인분의 몫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지금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사회의 가장 합리적인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주어진 몫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의 몫을 찾기 어렵다면, 스스로 본인의 몫을 찾아낼 수도 있어야 한다. 공급 과잉 시대인 요즘은 자신의 몫을 찾아내는 능력이 특히 중요하다. 각자가 그 몫을 해낼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여러 문제가 생긴다. 남의 몫을 탐하거나, 그들을 위해 각자 개인이 희생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모두가 능력을 갖추게 되면 우리 사회문제 중 꽤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니다. 

'능력'과 함께, '공감'이 필요하다.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이성적인 부분을 이야기한다면, '공감'은 감정적인 부분을 말한다. 각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남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다고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그럴 수 있고, 선생님이 그럴 수 있고, 요즘 같은 시대에는 특정 유튜브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 그들과 너, 즉 그들과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상황만 다른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다르다. 사람이라는 것만 같을 뿐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다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해냈다고, 당신도 해낼 수 있다는 논리는 폭력적인 논리일 수 있다. '공감'할 수 있어야 서로 존중할 수 있고, 존중이 있어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모두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취적으로 고민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모두가 갖추어야 할 마지막 미덕은 '적당함'이다. 참 애매하고 어려운 단어다. 그렇지만 이를 갖춰야 한다.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 적당함을 모르고 끝까지 가면 결국은 터질 수 밖에 없다. 터진다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부하가 걸린다. 적당함을 알고, 때로는 멈추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적당하지 않으면 결국 공감할 수 없게 되고, 공감할 수 없으면 능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결국 화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능력', '공감', '적당함' 힘겨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이 3가지만큼은 갖추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각자 상황에 맞는 고민을 하고 답을 찾아가면 좋겠다. 그래야 내 상황에서 나도 행복할 수 있고, 너의 상황에서 너도 행복할 수 있다. 그게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냥 나는 잘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일기글이나 써보려고 했는데 칼럼처럼 글이 써졌다.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지 생각하고 그 방향대로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우선 나부터 능력이 있는지, 공감할 수 있는지, 적당함을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을 더 해봐야겠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심도 깊게 고민해야겠다. 모두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좋은 답을 가지고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