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운동할겸 근처 산책을 했다. 문득 '히키코모리'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히키코모리'란 무엇인가부터, 나도 혹시 '히키코모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히키코모리'는 우리 사회에서 문제적 단어로 인식되곤한다. '히키코모리'는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이자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해 미디어가 부정적인 시각을 쏟아내었고,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단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왔고, 우리나라 미디어도 '히키코모리'를 대하는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현상 중 하나인 '히키코모리'가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곧 심각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주로 미디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자연스레 '히키코모리'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사회부적응이라던가, 골칫거리,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등의 수식어가 함께 따라붙는 경우도 자주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히키코모리'는 왜인지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선택했느냐에 대한 문제다. 미디어는 '히키코모리'를 코너에 몰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처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나는 '히키코모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가 아닌 선택이라 생각한다. 마음먹으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히키코모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히키코모리'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 '히키코모리'라는 단어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자유의지가 아닌 병으로 바라보는 미디어의 시선이 맞을까, 아니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바라보는 내가 맞을까. 단어의 시작은 미디어쪽이 맞다.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생겨났던 시기에는 분명 부정적이고 사회문제적인 시선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그리고 아직도 사전적으로는 그렇게 정의되고 있다. 우리가 즐겨쓰는, 그리고 맞다고 믿는 네이버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
그렇지만 아직도 '히키코모리'를 저렇게 사전적으로 정의하는게 맞을까. 단어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그 의미가 변한다. 예를 들어 "착하다"라는 말은 IMF 이전까지만 해도 칭찬이자 좋은 의미로로 쓰였다. 그렇지만 지금 "착하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주고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히키코모리'도 단어의 재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밖으로 나가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였던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이 때의 '히키코모리'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와야했고, 그래야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터넷이 보급되고 택배와 배달이 일상이 된 지금도 그럴까.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활동이 불가능할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없을까. 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살아갈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시대와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때의 '히키코모리'는 도피이자 회피였지만, 지금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되었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지만 에너지를 쓰는 사람도 있다. 에너지를 얻는 경우도 있고,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에너지를 잃는 양이 더 많다고 판단하면 충분히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히키코모리'가 되면 불편할까. 그렇지도 않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은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는 1990년대에 크게 이슈가 되었다.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나 택배 등이 활성화되기 이전이다. 무슨 일이든 직접 사람을 대면해서 진행해야했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힘겨워했던 '히키코모리'는 자연스레 떨어지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 넘어서부터다. 어느 정도 인터넷이 보급되고난 이후다. 일본에서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조금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히키코모리'를 선택의 문제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극단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도 중요하다. '히키코모리'의 단계에 대해 써져있는 글들을 보면 심각하다. 편의점에 가는것조차 어려워하고, 방문을 여는 것도 쉽지 않다. 가족과 말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나중에는 화장실가는 것까지 참는다고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병으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히키코모리'를 그렇게 극단적인 단어로 쓰는 것이 맞을까 싶다. 만약 '히키코모리'를 지금처럼 극단적 단어로 정의할 것이라면 새로운 단어가 하나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히키코모리'는 지금의 단어로 유지하고, 지금의 선택적 '히키코모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개인주의자'라는 단어가 맞을 것 같기도 한데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히키코모리'에 비해 단어가 너무 건강해서, 그 느낌을 살리지 못한다고나 해야하나. 내 주관적인 생각은 그렇다.
문득 '히키코모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히키코모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한 방어논리를 펼치기 위해 '히키코모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 보았다. 아마도 나는 선택적 '히키코모리'가 아닐까 싶다. 사회생활을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해낼 수 있다. 그렇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면 타인과의 관계를 많이, 다양하게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지만, 그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고 싶지는 않다. 아주 많이 돌아다니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히키코모리'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충분히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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